한국 드라마를 보면 극단적인 부유층이나 빈곤층이 등장하더라도, 이야기의 기준점은 중산층 가정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집의 규모, 생활 수준, 가족 구성은 “너무 가난하지도, 지나치게 부유하지도 않은” 중간 지점으로 설정된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와 드라마가 시청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중산층이 ‘보편적 삶’으로 인식된 사회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은 오랫동안 ‘보통 사람의 삶’을 대표하는 기준으로 인식되어 왔다. 산업화와 경제 성장 과정에서 안정적인 직장, 자가 주택, 가족 중심 생활은 다수의 사람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목표였다. 중산층은 특별한 성공이 아닌, 성실하게 살면 도달할 수 있는 표준적 삶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드라마는 이러한 인식을 그대로 활용한다. 중산층 가정은 시청자가 별도의 설명 없이도 즉각 이해할 수 있는 생활 수준이며, 과도한 설정 설명이 필요 없는 안전한 출발점이다. 이로 인해 중산층 가정은 이야기의 기준선, 즉 ‘정상 상태’로 설정된다.
공감 가능한 출발선을 만드는 서사 전략
드라마는 시청자의 감정 이입을 전제로 하는 매체다. 중산층 가정은 가장 많은 시청자가 자신의 삶과 겹쳐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너무 부유한 삶은 거리감을 만들고, 극단적인 빈곤은 부담을 줄 수 있다. 중산층은 공감과 관찰이 모두 가능한 지점이다.
이러한 기준점 설정은 주인공의 변화와 갈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데에도 유리하다. 중산층 가정에서 출발해 위로 이동하거나 아래로 추락하는 과정은 극적 긴장과 현실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드라마는 중산층을 중심에 두고, 계층 이동의 가능성과 불안을 함께 그려낸다.
사회 안정의 상징으로서의 중산층
중산층은 사회 안정의 상징으로 기능해왔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불안정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위치는 한국 사회 다수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드라마 속 중산층 가정은 안정과 불안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부모는 자녀 교육과 노후를 걱정하고, 자녀는 취업과 독립에 대한 압박을 느낀다. 큰 위기는 없지만, 언제든 균형이 깨질 수 있는 상태는 드라마 갈등을 만들기에 적합하다. 중산층 가정은 일상의 위기와 선택을 다루는 데 가장 현실적인 무대가 된다.
계층 문제를 완충하는 역할
드라마에서 중산층 가정은 계층 간 갈등을 완충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상층과 하층의 대비를 직접적으로 충돌시키기보다는, 중산층을 중심에 두고 양쪽을 비추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드라마는 계층 문제를 과도하게 날카롭지 않게 다룰 수 있다.
중산층 인물은 위를 바라보며 불안을 느끼고, 아래를 보며 상대적 안도감을 느끼는 위치에 놓인다. 이러한 시선은 한국 사회가 계층을 인식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드라마는 중산층을 통해 계층 구조를 설명하면서도, 시청자가 감정적으로 과도한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조절한다.
가족 서사와 결합하기 쉬운 구조
중산층 가정은 가족 중심 서사와 결합하기에 가장 적합한 구조를 가진다. 부모의 직업, 자녀의 진로, 주거 문제, 교육비, 결혼과 독립은 중산층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갈등이다. 이는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극단적인 빈곤이나 재벌 가정에서는 발생하기 어려운 ‘일상적 선택의 갈등’은 중산층 가정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드라마는 이를 통해 가족 구성원 각자의 욕망과 책임을 입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중산층 신화의 잔존
한국 드라마에서 중산층 가정이 기준점으로 유지되는 또 다른 이유는, 중산층 신화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중산층의 불안정성이 커졌지만, 여전히 중산층은 많은 사람이 지향하거나 유지하고 싶어 하는 위치로 남아 있다.
드라마는 현실보다 한 발 늦게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중산층을 ‘기본값’으로 설정하는 서사는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 구조로 작동한다. 이는 시청자에게 완전히 낯선 현실보다, 익숙한 틀 안에서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최근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변화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는 중산층 가정의 불안정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는 시도도 늘고 있다. 안정적으로 보이던 가정이 갑작스러운 실직, 질병, 부채로 흔들리는 서사는 중산층이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출발점 자체는 중산층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중산층이 무너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중산층을 통해 사회 구조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를 서사로 풀어낸다.
정리
드라마에서 중산층 가정이 기준점으로 설정되는 이유는 단순한 관습이 아니다. 중산층이 보편적 삶으로 인식되어 온 사회적 배경, 높은 공감도, 안정과 불안이 공존하는 구조, 계층 갈등을 완충하는 기능, 가족 서사와의 높은 결합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한국 드라마는 중산층 가정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개인의 삶과 사회 구조를 동시에 설명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산층 가정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기능하고 있다.